30주년 의의

서울특별시의회 부활 30주년의 의미

서울시의회 및 지방자치 부활 30년의 역사

1949년 7월 4일, 대한민국에 지방자치법이 제정 공포되어 지방자치의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후 1950년 지방선거가 6.25 전쟁 등으로 인해 지연되다가, 1952년 4월 25일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지방의회 의원선거가 시행되었습니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강원 및 한강 이북 미수복지구는 1956년 8월 지방선거가 실시되어 초대 시의회가 개원하였고, 1960년에는 2대 의회가 개원하였으며, 2대 의회가 개원하기 전, 그 해 봄에는 민주주의의 시작이라 평가받는 4·19시민혁명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지방의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지방자치도 중단되었고 1972년 유신헌법 등으로 전국의 지방의회와 함께 서울시의회도 긴 공백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후, 1987년 전국적 반독재 민주화운동인 6․10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및 지방자치 부활 등의 민주화를 이끌어내 지방의회가 30년 만인 1991년 7월 8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헌법 제10호 전부개정]

5·16군사쿠데타로 해산되었던 지방의회는 6.10 민주항쟁과 1990년 김대중 야당 총재 단식 투쟁 등을 통해 30년 만인 1991년 7월 8일에 부활하였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향해 투쟁했던 국민들의 피와 땀이 만들어 낸 값진 결과였습니다.

서울시의회 건물의 수난사 및 정문 복원 논의

서울시의회 건물은 1935년 일제 강점기에 완공되어 경성부의 대집회용 건물(부민관)로 사용되었으며, 1945년 7월 애국 청년들이 친일파 일당의 친일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곳입니다. [부민관 폭파 의거 1945.7.24.]

1960년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던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는 그 해 3월과 4월에 수만 명의 학생들이 독재 정권과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대적인 궐기로 4·19혁명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서울시의회 건물은 1950년대 중엽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5·16 군사쿠데타 및 유신헌법 직후 계엄령 선포 등 반민주적인 국가폭력에 의해 의사당이 폐쇄되었던 아픈 경험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1975년, 국회가 여의도로 옮긴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차량 증가로 인해 당시 세종문화회관 별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의 앞마당의 차도가 확장되어 의회 정문이 폐쇄되었습니다.
이후 건물이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1991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시의회 건물에는 정문이 없어, 시의회 의사당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정문 대신 쪽문을 이용해 오고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사회 분위기가 사람 중심으로 변모하고, 최근에는 ‘광화문 광장 재조성 사업’ 이 이루어지면서, 이로 인해 보도 확장과 더불어 서울시의회 정문 복원에 대한 논의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서울시의회 부활 30주년 기념사업의 추진의의

제3대 서울특별시의회가 개원한 1991년 7월 8일을 기준으로, 올해는 서울시의회 부활 3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서울시의회가 부활한 지 30주년이 되는 역사적 사실 앞에, 서울시의회는 시민과 함께 달려온 서울특별시의회 부활 30년 역사를 기념하고, 시민과 함께 할 향후 비전을 제시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의회의 지방자치 선도도시로서 민주적 기능과 역할을 다짐하기 위한  「서울시의회 부활 30주년」  기념 사업을 통해서 서울특별시의회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자치분권의 의미를 되새기며 시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겠습니다.

서울특별시의회 역사

서울시가 근대적 의미의 민주적 지방자치제를 실시한 것은 초대시의회가 구성된 1956년 9월 5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미군정에 의해 1946년 8월 서울시헌장을 발표하여서울시 의결기관인 민선 참사회를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는 정부수립 전까지 참사회원이 관선으로 임명되어 운영됨으로써 실질적인 지방자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수립 이후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이 제정 공포되었으나, 지방 의회의원 선거의 연기및 한국전쟁 등의 우여곡절로 계속 연기되어 오다 1956년 2차에 걸친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1956년 8월 13일 민선 시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의원정수 47명으로 구성된 초대 시의회가 개원되었으며, 1960년 8월 12일 의원 임기만료일까지 총 8회의 정기회와 37회의 임시회를 개회하였다.

제2대 의회는 1960년 12월 12일 의원 정수 54명으로 구성되어 연 10회의 회의를 개회하였으나 1961년 5월 16일 발표된 포고령 제4호에 의해 해산되었다.

제2대 의회 해산 이후 30여 년 동안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못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여 오다가 1990년 12월 31일 지방자치법 개정(법률 제4310호)으로 1991년 6월 20일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7월 8일 의원정수 132명으로 구성된 제3대 의회를 개원, 임시회 29회,정기회 4회를 개회하였다.

제4대 의회는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여 7월 12일 의원정수 147명으로 개원하여 임시회 28회, 정기회 3회를개회하였다.

제5대 의회는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여 7월 9일 의원정수 104명(지역구94, 비례대표10)으로 개원하여 임시회28회, 정기회 7회를 개회하였다.

제6대 의회는 2002년 6월 13일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여 7월 9일 의원정수 102명(지역구 92, 비례대표 10)으로 개원하여 임시회 28회, 정기회 8회를 개회하였다.

제7대 의회는 2006년 5월 31일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여 7월 12일 의원정수 106명(지역구 96, 비례대표 10)으로 제7대 시의회를 개원하여 임시회 23회, 정기회 8회를 개회하였다.

제8대 의회는 2010년 6월 2일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여 7월 13일 시의원 106명(지역구 96, 비례대표 10)과 교육의원 8명(8개 선거구)으로 총 의원정수 114명으로 개원하여 임시회 23회, 정례회 8회를 개회하였다.

제9대 의회는 2014년 6월 4일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여 7월 16일 의원정수 106명(지역구 96, 비례대표 10)으로 개원하여 임시회 20회, 정례회 8회를 개회하였다.

제10대 의회는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여 7월 11일 의원정수 110명(지역구 100, 비례대표 10)으로 개원하였다.

서울특별시의회 연혁

초대 - 1956. 9. 5 ~ 1960. 8. 12
-1949. 07. 04지방자치법 공포
-1956. 08. 13초대 서울시의회 의원 선거 (47명 선출)
-1956. 09. 05초대 서울시의회 개원 (제 1기 의장단 선출)
-1957. 09. 04제 2기 의장단 선출
-1958. 10. 15제 3기 의장단 선출
-1960. 05. 13제 4기 의장단 선출

2대 - 1960. 12. 12 ~ 1961. 5. 16
-1960. 12. 12제 2대 서울시의회 의원 선거 (54명)
-1960. 12. 22제 2대 서울시의회 개원, 의장단 선출
-1961. 05. 16군사정부포고령 제 4호로 해산

3대 - 1991. 7. 1 ~ 1995. 6. 30
-1990. 12. 31지방자치법 제9차 개정 (법률 제4310호), 
  ( ’91.6.30 이내 지방의회의원 선거 실시 규정)
-1991. 06. 20제3대 서울시의회 의원 선거 (132명 선출)
-1991. 07. 08제3대 서울시의회 개원, 전반기 의장단 선출
-1993. 07. 08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출

4대 - 1995. 7. 1 ~ 1998. 6. 30
-1995. 06. 27제4대 서울시의회 의원선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47명 선출 - 지역구 133명, 비례대표 14명)
-1995. 07. 12제4대 서울시의회 개원, 전반기 의장단 선출
-1996. 04. 11보궐선거 (4개 선거구)
-1996. 09. 12보궐 ㆍ 재선거 (2개 선거구)
-1997. 01. 08제4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출
-1997. 03. 06보궐 ㆍ 재선거 (3개 선거구)

5대 - 1998. 7. 1 ~ 2002. 6. 30
-1998. 06. 04제5대 서울시의회 의원선거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04명 선출 – 지역구 94명, 비례대표 10명)
-1998. 07. 09제5대 서울시의회 개원, 전반기 의장단 선출
-2000. 06. 08보궐 ㆍ 재선거 (7개 선거구)
-2000. 07. 13제5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출
-2000. 10. 26보궐 ㆍ 재선거 (3개 선거구)

6대 - 2002. 7. 1 ~ 2006. 6. 30
-2002. 06. 13제6대 서울시의회 의원선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02명 선출 - 지역구 92명, 비례대표 10명)
-2002. 07. 09제6대 서울시의회 개원, 전반기 의장단 선출
-2004. 02. 05의장 보궐선거
-2004. 06. 05보궐선거 (8개 선거구)
-2004. 07. 09제6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출
-2004. 10. 30보궐선거 (1개 선거구)

7대 - 2006. 7. 1 ~ 2010. 6. 30
-2006. 05. 31제7대 서울시의회 의원선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06명 선출 - 지역구 96명, 비례대표 10명)
-2006. 07. 12제7대 서울시의회 개원, 전반기 의장단 선출
-2008. 07. 12제7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출
-2008. 11. 25제7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 선출 (보궐선거)

8대 - 2010. 7. 1 ~ 2014. 6. 30
-2010. 06. 02 제8대 서울시의회 의원선거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14명 선출 - 지역구 96명, 비례대표 10명, 교육의원 8명)
-2010. 07. 13제8대 서울시의회 개원, 전반기 의장단 선출
-2011. 10. 26보궐선거 (2개 선거구)
-2012. 04. 11보궐선거 (2개 선거구)
-2012. 07. 13제8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출

9대 - 2014. 7. 1 ~ 2018. 6. 30
-2014. 06. 04제9대 서울시의회 의원선거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06명 선출 - 지역구 96명, 비례대표 10명)
-2014. 07. 16제9대 서울시의회 개원, 전반기 의장단 선출
-2015. 10. 28보궐선거(1개 선거구)
-2016. 04. 13보궐선거(2개 선거구)
-2016. 06. 27제9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10대 - 2018. 7. 1 ~ 현재
-2018. 06. 13제10대 서울시의회 의원선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10명 선출 - 지역구 100명, 비례대표 10명)
-2018. 07. 11제10대 서울시의회 개원, 전반기 의장단 선출
-2020. 06. 25제10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출

서울특별시의회 건축물

일제 때 경성부의 대집회용 건물로 세워진 것으로, 1934년 7월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 해 12월 10일 완공되었다. 부민관 내에는 대강당, 중강당, 소강당, 사교실 등 많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당시로서는 경성 유수의 건물이었으며, 대강당은 좌석 약 2,000석이 되는 큰 것으로 연극, 강연회, 음악회, 기타 대소집회를 치를 수 있는 곳이었다.

[ 부민관 폭파의거 터 ]
"1945년 7월 24일 애국 청년 조문기(趙文紀), 류만수(柳萬秀), 강윤국(康潤國)이 친일파 박춘금(朴春琴)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1945년 7월 24일에 일어난 부민관 폭파 의거는 당시 부민관에서 조선총독과 조선군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아세아민족분격대회(일제 말기의 친일파 박춘금이 일본에 충성을 표시하고 아시아 민족을 전쟁의 제물로 내몰기 위한 친일 관제 민중대회)’가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의 주최로 열리고 있는 중 조문기(趙文紀) ㆍ 유만수(柳萬秀) ㆍ 강윤국(康潤國)이 사제폭탄 2개를 터트린 사건이다. 이 의거로 이른바 ‘아세아민족분격대회’는 수포로 돌아갔고, 해방 20일 전에 일어난 이 의거는 우리민족 독립항쟁의 마지막 정열을 대변한 쾌거로서 그 끝을 장식하였다 할 수 있다.

광복 후 한국전쟁까지 주로 연극 상연장으로 사용되었고, 환도 후인 1950년대 중엽부터 국회의사당으로 개조해 사용되었다.대한민국 제2대 국회부터 9대 초반까지 활용되었으며, 당시 근대민법제정, 내각책임제 개헌, 유신헌법 제정, 월남파병 동의 등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많은 사건이 있었다.

1975년 이후 다시 서울시의 관할로 되돌아와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각종 공연과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당초 태평로의 대로변에 접해 있던, 램프 달린 주 현관은 도로 확장 때문에 헐리고, 탑하부(塔下部) 남쪽에 새로 현관을 만들어 그 이전의 균형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이 제정ㆍ공포되었으나, 지방의회 의원 선거의 연기 및 6.25전쟁 등의 우여곡절로 계속 연기되어 오다 1956년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민선 시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초대 시의회가 개원되었고, 제2대 시의회는 1960년 12월 12일 구성되었으나 1961년 5월 16일 발표된 포고령 제4호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여 오다가 1990년 12월 31일 지방자치법 제9차 개정(법률 제4310호)으로 1991년 6월 20일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의원정수 132명으로 구성된 제3대 시의회를 개원하였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던 것을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서울시의회 본관
1935년에 지어져 당초 경성부민관으로 활용되다가 여러 용도를 거쳐 1991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시의회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총 면적은 연 6,009.75㎡에 이르며 지상 4층, 지하1층 건물로서 모서리 부분에 63 척의 탑을 올리고 있다. 본관에는 시의회 본회의장, 운영위원회 회의장, 의장실 및 시의회사무처 등이 자리 하고 있다.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1973년에 구축된 건물을 1996년 리모델링하여 현재까지 시의회 별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상 9층, 지하 1층짜리 건물로 연면적 7,683.67㎡에 이르며 9개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의원연구실, 대회의실 및 시의회 자료실 등이 있다.